노비의 손으로 조선의 시간을 만들다 — 장영실은 왜 기록에서 지워졌나
결론부터: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조선에서 가장 낮은 신분으로 태어나 세종이 가장 아낀 기술자가 된 사람입니다. 스스로 치는 물시계 자격루, 백성을 위한 해시계 앙부일구, 비의 양을 재는 측우기 체계가 그의 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1442년 임금이 탈 가마가 부서진 사건 뒤, 왕의 하루하루를 기록한 실록에서 그의 이름은 단 한 번도 다시 나오지 않습니다. 관노의 아들을 알아본 세종의 눈 실록은 그의 아버지가 원나라에서 귀화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동래의 관기였다고 전합니다. 관기의 자식은 태어나는 순간 관노였습니다. 쇠와 나무를 다루는 솜씨가 남다르다는 소문이 한양에 닿아 태종이 그를 보호했고, 세종은 신분이 아니라 재능으로 사람을 쓰겠다는 뜻을 그에게서 가장 먼저 시험했습니다. 1421년 세종은 그를 명나라에 보내 천문 기기의 모양과 만드는 법을 배워 오게 했고, 1423년에는 노비 신분을 풀어 주는 면천과 함께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자격루·앙부일구·측우기 — 백성을 위한 시간 1434년 자격루 물이 흘러 구슬을 떨어뜨리면 인형이 종·북·징을 쳐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 — 국가 표준시계 1434년 앙부일구 거리의 해시계.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열두 동물 그림을 새김 갑인자 20만 자가 넘는 구리 활자 — 하루 40장을 찍어도 흐트러지지 않음 1442년 측우기 같은 크기로 만들어 전국 관청에 보급 — 유럽보다 약 200년 앞선 강우 측정 체계 (세자 구상·장영실 제작으로 전해짐) 대신들이 노비 출신에게 벼슬이 과하다고 반대했을 때, 세종은 "태종께서 그를 보호하셨고, 나 또한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알아보는 눈과 답하는 손 — 스무 해의 신뢰가 조선 과학의 황금기를 만들었습니다. 1442년, 가마가 부러진 날 이후 실록에서 사라진 이름 1442년 3월, 세종이 온천으로 행차할 때 쓸 가마를 장영실이 감독해 만들었으나 견고하지 못해 부러졌습니다. 임금은 아직 타지 않은 상태였지만, 의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