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 Farnsworth — How did a 14-year-old boy beat the giant corporation RCA?

 

필로 판즈워스 — 14살에 텔레비전을 그려 낸 농장 소년

결론부터: 텔레비전은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감자밭에서 시작됐습니다. 1921년 여름, 아이다호에서 쟁기를 몰던 14살 소년 필로 판즈워스는 줄지어 늘어선 밭고랑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그림도 저렇게 한 줄씩 나눠서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전자식 텔레비전을 처음 그려 낸 사람이 됐고, 미국 최대 전자 기업 RCA와의 특허 전쟁에서 끝내 이겼습니다. 그런데도 승리의 열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영어판 이야기는 이미 블로그에 있습니다: Philo Farnsworth — How did a 14-year-old boy beat the giant corporation RCA?

쟁기질하던 소년이 칠판에 그린 텔레비전

판즈워스는 1906년 유타주 비버에서 태어나 아이다호 리그비의 농장에서 자랐습니다. 집에 발전기가 들어온 날부터 전기와 기계를 다룬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고, 어른들이 고장 난 기계를 못 고칠 때 오히려 소년이 나서서 고쳐 내곤 했다고 전해집니다. 열 살 남짓에 낡은 과학 잡지에서 텔레비전이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읽은 그는, 원판을 돌려 빛을 쪼개는 기계식 방식으로는 선명한 화면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했습니다. 회전하는 원판은 너무 느렸습니다. 답은 전자였습니다. 전자는 빛처럼 빠르니까, 그 빠른 전자를 줄 단위로 훑게 만들면 그림 한 장을 순식간에 읽어 낼 수 있습니다.

1922년 봄, 판즈워스는 고등학교 화학 교사 저스틴 톨먼의 교실 칠판 앞에 섰습니다. 소년은 분필을 들어, 자신이 구상한 전자식 텔레비전 시스템 전체를 칠판 가득 그려 냈습니다. 빛을 전기로 바꾸는 장치, 그 전기를 줄 단위로 읽어 내는 방법, 받는 쪽에서 다시 그림으로 쌓아 올리는 구조까지 빠진 곳이 없었습니다. 톨먼은 그 그림을 유심히 보고 기억해 두었습니다. 한 소년의 칠판 그림이 13년 뒤 미국 특허청에서 거대 기업의 운명을 가를 결정적 증거가 될 줄은, 그때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미지 디섹터 — 밭고랑처럼 한 줄씩 읽는 장치

소년의 구상에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미지 디섹터(Image Dissector), 우리말로 옮기면 '영상을 해부하는 장치'입니다. 이름은 어렵지만 원리는 밭고랑과 같습니다. 쟁기가 한 고랑씩 땅을 읽어 나가듯, 이 장치는 화면을 맨 윗줄부터 한 줄씩 차례로 읽어 각 지점의 밝고 어두움을 전기 신호의 세기로 바꿉니다. 마치 책을 읽을 때 눈이 한 줄씩 내려가며 글자를 훑는 것과 같습니다. 핵심은 속도였습니다. 그림 한 장을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줄로 나눠 읽고 다시 쌓으면, 사람의 눈은 그것을 끊기지 않는 영상으로 받아들입니다.

1927년 1월, 21살이 된 판즈워스는 텔레비전 시스템의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미국 특허 제1,773,980호로 이어지는 출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7일,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실험실에서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이미지 디섹터 카메라 앞의 그림이 전선을 타고 건너편 화면에 나타난 것입니다. 전송된 영상은 직선 한 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그림이었지만, 그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순수한 전자 방식으로 전송된 텔레비전 영상이었습니다. 1928년에는 언론 앞에서 시연을 했고, 1929년에는 아내 펨의 모습이 그 화면에 올랐습니다. 펨은 전자식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됐습니다.

거인 RCA의 제안 — 10만 달러에 특허를 통째로

판즈워스의 앞에는 거인이 서 있었습니다. 미국 최대의 전자 기업 RCA, 그리고 그 정점의 데이비드 사노프 회장입니다. RCA에는 또 한 명의 발명가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블라디미르 즈워리킨 — 그는 1923년에 이미 전자식 텔레비전 특허를 출원했지만, 당시에는 실제로 작동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1930년, 즈워리킨은 판즈워스의 실험실을 직접 찾아와 이미지 디섹터를 손에 들고 들여다봤습니다. 펨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아름다운 기기다. 내가 발명했더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발명 전쟁에서 누가 먼저였는지를 가리는 싸움은 이 블로그의 또 다른 이야기와도 닮았습니다. 전화기 특허는 몇 시간 차이로 갈렸다 — 벨과 그레이의 발렌타인데이를 함께 읽어 보세요.

1931년, 사노프 측은 판즈워스에게 특허를 통째로 사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펨과 동료 에버슨의 회고에 따르면 그 금액은 10만 달러 — 지금 돈으로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큰돈이었고, 25살의 무명 발명가에게는 평생을 바꿀 수 있는 액수였습니다. 그러나 판즈워스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기술을 한 번에 팔아넘기는 대신, 텔레비전이 팔릴 때마다 일정한 사용료(로열티)를 받는 방식을 원했습니다. 자신의 발명이 세상을 바꿀 것임을 알았기에, 그 가치를 한 번의 거래로 넘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거절이 그를 거대 기업과의 기나긴 전쟁 한가운데로 밀어 넣었습니다.

13년 전 칠판 그림을 기억한 시골 교사

전쟁은 법정에서 벌어졌습니다. RCA는 특허의 우선권이 즈워리킨에게 있다며 미국 특허청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서류와 기록이 맞붙는 싸움에서 판즈워스 측이 꺼내 든 것은 뜻밖의 카드였습니다. 1922년의 고등학교 화학 교사, 저스틴 톨먼이었습니다. 톨먼은 법정에 나와, 13년 전 한 소년이 칠판에 그렸던 전자식 텔레비전의 스케치를 종이 위에 그대로 재현해 냈습니다. 날짜도, 구조도, 소년의 설명까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 시골 교사의 기억이, 거대 기업의 법무팀이 쌓아 올린 주장보다 무거웠습니다. 1935년, 미국 특허청은 판즈워스의 우선권을 인정했고, 이듬해 RCA가 제기한 항소도 기각됐습니다. 감자밭의 소년이 마침내 골리앗을 이긴 것입니다.

연도사건
192114살, 감자밭 고랑에서 전자식 주사 방식을 착안
1922화학 교사 톨먼의 칠판에 시스템 전체를 그림
1927특허 출원 (미 특허 1,773,980호) / 9월 7일 첫 전자식 전송 성공
1931RCA의 10만 달러 매입 제안을 거절
1935특허청, 판즈워스의 우선권 인정 (톨먼의 증언 결정타)
1939RCA와 100만 달러 로열티 라이선스 계약
1947텔레비전 보급이 본격화되는 해, 핵심 특허 만료
1999타임지 '20세기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선정

RCA 역사상 처음, 외부 발명가에게 로열티를 지불하다

승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유럽에서는 그의 이미지 디섹터 기술이 실제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독일 기업과의 제휴로 만들어진 카메라 일부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중계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1939년 9월, 10년 넘게 이어진 다툼 끝에 RCA는 판즈워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습니다. 총 100만 달러 규모의 로열티 계약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돈의 크기만이 아닙니다. RCA가 외부의 독립 발명가에게 로열티를 지불하기로 한 것은 그 회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받아들이기만 하던 거인이 처음으로 한 개인에게 머리를 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반전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는데, 승리의 열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1939년 RCA는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텔레비전을 대대적으로 선보이며 '텔레비전의 아버지'라는 이미지를 굳혀 갔고, 정작 발명가의 이름은 그 화려한 무대 어디에도 크게 오르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텔레비전의 제조와 보급 자체가 멈춰 섰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텔레비전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1947년, 하필 그해에 판즈워스의 핵심 특허가 만료됐습니다. 모두가 텔레비전을 사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로열티를 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타이밍이라는 운명은 때로 실력보다 잔인합니다.

아내 펨이 28년을 싸워 되찾은 이름

1949년 판즈워스의 회사는 대기업 ITT에 매각됐습니다. 그는 핵융합 장치인 퓨저를 비롯해 평생 300건이 넘는 특허(미국 특허만 160여 건)를 남기며 발명을 계속했지만, 세상은 그를 빠르게 잊었습니다. 1971년 3월 11일, 그는 유타주 자택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텔레비전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이, 텔레비전 뉴스에 이름 한 번 오르지 못한 채 떠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 펨이 싸움을 이어 갔기 때문입니다. 펨은 수십 년 동안 편지를 쓰고 자료를 모아 남편의 이름을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기다림 끝에 1984년 판즈워스는 전미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99년 타임은 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8년 만의 복권이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텔레비전을 발명한 사람은 결국 누구인가요?
A. 전자식 텔레비전의 핵심 원리(줄 단위 주사)와 그것을 처음 작동시킨 기록은 판즈워스에게 있습니다. 미국 특허청도 1935년 그의 우선권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상용화와 대중화는 RCA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몫이었습니다.

Q. 톨먼 선생의 증언이 왜 그렇게 결정적이었나요?
A. 특허 우선권 다툼에서는 '누가 먼저 구상했는가'를 날짜로 증명해야 합니다. 톨먼은 13년 전 칠판 그림의 날짜와 구조, 소년의 설명까지 구체적으로 재현해 냈고, 그것이 즈워리킨의 기록보다 앞선 구상의 증거가 됐습니다.

Q. 판즈워스는 왜 부자가 되지 못했나요?
A.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으로 텔레비전 보급이 멈췄고, 보급이 본격화되는 1947년에 핵심 특허가 만료됐기 때문입니다.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창이 사실상 닫힌 셈입니다.

이긴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끝까지 전한 사람이 이름을 얻는다

이 이야기가 남기는 것은 특허 전쟁의 승패만이 아닙니다. 한 시골 선생님이 13년 전 소년의 칠판 그림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증언은 세월을 견디고 진실은 늦게라도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진실이 끝내 돌아온 데에는, 남편이 떠난 뒤에도 수십 년을 싸운 아내의 평생이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 뒤에는 감자밭의 소년과 칠판 앞의 선생님,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아내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텔레비전의 발명가 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들려주세요.

Watch the full video: https://youtu.be/lqxmFdtvSC0

먼저 보면 좋은 영상

  • 테슬라 이야기 1부: https://youtu.be/f-Rek-UtHp8
  • 킬리 사기극: https://youtu.be/E_oDvOEqqVo

이 이야기는 유튜브 채널 와우사이언스(WowScience by TechSensia)의 영상으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sLQQGWfka8togimX32jxsA?sub_confirmation=1 — 유튜브에서 '와우사이언스'를 검색해 보세요. 📷 인스타그램에서도 짧은 영상으로 만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wowscience.techsen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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